5월11일 -기차여행하다-
공휴일을 맞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마산의 친척 병문안을 갔다. 차로 갈까? 기차로 갈까?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기차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장애아카드가 있어서 할인이 되었다. 나는 장애아 카드를 VIP카드라고 부른다. 어디를 가든 장애인 전용 주차공간은 있다. 그것도 목적지 건물의 바로 코앞에. 회사의 사장님의 전용주차공간 보다 더 편리하다.
마산에 도착하자 녀석의 눈에 신기한 것이 보이는 가 보다. 주차된 차의 번호판을 보고 피식피식 웃었다. 대구 번호판만 보다가 경남 번호판을 처음 본 것이다. 우리는 사소하게 지나치는 것들이 녀석의 눈에는 크게 띄이는 모양이다.
아마도 녀석이 항상 숫자에 집착하기 때문에 평소에 번호판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하긴 안양에 있을 때 주차된 차 번호판의 마지막 숫자를 다 읽어야 그 거리를 지나칠 수 있었다. 아내는 비오는 날 다혜를 업고 우산을 받쳐 들고 다니엘을 데리고 오는 데 녀석이 번호판을 다 읽어야만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는 그나마 번호판의 번호를 다 읽지 않고 마지막 숫자만 읽는 것으로 고맙다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녀석이 또 불만을 나타냈다. 병원에 4층이 없다는 것이다. 2시간 가까이 이 문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6층에서 1층의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서 왜 4층이 없냐고 계속 캐물었다. 나는 한자의 '죽을 사'자에서부터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설명해 주었다. 나의 설명을 다 들은 녀석이 하는 말 "왜 4층이 없지?" 다혜는 이해를 하고 '5층이 진짜로는 4층이다' 하며 나를 도와 주었다.
그래도 영 기분이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4층이 없으면 위험하다. 규칙에 딱 맞아야 돼" 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이런 문장을 자유자재로 쓰는 녀석이 5층이 4층이 될 수 있는 응용력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다니엘의 완벽주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실로 돌아 온 녀석이 계속 이 문제로 엄마에게 시비를 걸었다. 담석증으로 입원 중인 녀석의 이모가 4층이 없으면 위험하다는 녀석의 볼멘 소리를 듣더니 배를 잡고 웃었다. 혼자 병원을 지키며 웃을 일이 없던 이모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원래 담석증은 예민한 사람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생길 수 있는 병이라고 한다. 다니엘이 일주일만 이 병원에 있으면 이모의 병도 치료할 것 같았다.
녀석이 병실을 두리번 거리더니 달력의 4일자를 가리켰다. "1,2,3 다음에는 4가 있어야 돼" 했다. 또 시계를 보더니 4가 있음을 확인하고 조금 마음이 가라 앉았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쥬스를 달라고 했는데 없었다. 그래서 1000원을 주고 혼자 사 오라고 했다. 혼자 가게에 보내기는 처음이다. 자기가 가겠다고 해서 보냈다. 조금 후 500원 짜리 쥬스를 사고 500원을 거슬러 왔다. 우리는 흐뭇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산에서 돌아 온 후 같은 교회에 다니는 드보라 엄마를 만났다. 드보라 엄마가 아침에 다니엘을 가게에서 만났단다. 그런데 다니엘이 1000원짜리 음료수를 들고 비싸다고 500원을 깎아 달라고 실랑이를 벌였단다. 가게 아줌마는 말이 안통해서 답답해 하고 다니엘은 울고 있었다. 결국 아줌마는 500원짜리 쥬스로 바꾸어 주고 500원을 거슬러 주었단다.
최근에 다니엘은 1000원은 무엇이든 비싸다고 생각한다. 2주전에 내가 다니엘,다혜를 데리고 목욕을 다녀오면서 과자를 고르도록 했다. 다니엘은 500원짜리 과자를 골랐는데 다혜는 1000원짜리를 골랐다. 그래서 내가 다혜에게 1000원은 비싸다고 했다. 그 이후로 다니엘은 1000원은 무조건 비싸다는 생각이 각인이 된 것 같다.
공책을 보면 1000이라고 적혀 있는데 녀석이 비싼 공책이 아까와서 쓰지도 못한다. 공책뿐만 아니라 연필도 아까와서 못쓴다.
학교에서 알림장을 쓰는데 최근에 다니엘이 알림장을 가장 늦게 썼다. 선생님은 다니엘이 자기 것은 비싸다고 아까와서 쓰지 않는다고 하셨다. 옆짝인 바울이가 알림장을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울이의 연필을 빌려서 쓴단다. 또 알림장에 쓰지도 않고 연습장에 써왔다. 공책을 사면 1000이라고 쓰인 부분을 자기가 지워 버린다. 그리고는 겉장에 '아껴쓰세요'라고 적는다. 내가 녀석에게 외제 학용품이라도 사 주었으면 말도 안한다. 그동안 우리가 아이들에게 절약을 너무 많이 가르친 듯 하다.
할인점에 가서 아이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물건을 고르면 비싸다는 이유로 사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비싸다는 개념은 곧 구입할 수 없다는 개념으로 정착된 듯 하다. 그런데 오늘 1000원을 주고 쥬스를 사오라고 했더니 비싼 1000원이 부담이 되었던 가 보다. 녀석의 마음속에 1000원=비쌈이라는 등식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어린이 날에 자기가 선택한 기차는 39000원 짜리였는데 그것은 비싸지 않고 1000원은 무조건 비싸다고 생각하니 이 이상한 각인을 어떻게 깨어야 할까?한번 각인된 것과 원리원칙주의를 깨뜨리고 융통성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신문을 보고 우리 다니엘이 다 나은 것처럼 생각할 까봐 걱정도 된다. 자폐성향은 뿌리가 깊기 때문에 완전히 고친다는 것은 더 많은 인내와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10년은 지금과 같은 아니 지금이상으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니엘의 마음속에 각인된 1000원은 비싸다는 개념을 De프로그램(한번 입력된 프로그램을 지우고 다른 프로그램을 입력하는 정신과적 프로그램)하기 위해서는 1000원짜리 물건만 보면 "와! 싸다"하고 Over action을 해야겠다.
또 대상에 따라 1000원이 비쌀 수도 있고 쌀 수도 있는 상대적인 개념을 가르쳐야겠다.
이 훈련을 하다보면 원리원칙과 규칙의 연산인 수학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다니엘에게 상대성과 융통성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같다. 완벽주의와 규칙이라는 갇힌 방에 작은 창틀을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연구소의 사회성 프로그램중에 시장놀이 프로그램이 있다. 박선생님께 부탁해서 다니엘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주문해야겠다.
아빠가 소장인 연구소니 이 정도 혜택은 있어도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다니엘도 수업료를 내고 교육을 받으니 아동의 부모로서 교사에게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다니엘은 4층이 없는 마산의 병원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나보다. 다음에 다른 병원에 갈 일이 있으면 다시 한번 병원에는 4층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겠다. 병실을 나오면서 우리 팀이 가장 확실한 담석증 환자의 위문공연단이 되었음을 확인한 하루였다. 녀석이 마산에 두고 온 병원이 걱정돼서 잠이나 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