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탁이 어멍 2010. 4. 29. 02:48

작년까지만 해도 육아일기를 내가 꼭 쓰고 싶은 날 썼다.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업데이트 하는 차원에서 쓰는 횟수가 많아졌다. 고정적으로 육아일기를 보시는 부모님이 많아지면서 무언의 압박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내가 사랑하는 한 후배가 나의 육아일기가 조금씩 보는 사람을 의식하는 듯 하다고 충고한다. 의식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내는 깔끔하던 육아일기가 질질 끌고 불필요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고 핀잔을 준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가 일기를 쓰고 나면 아내에게 검사를 맡아야 한다. 그래서 그나마 많이 줄었다.

 그런데 자신을 살펴 보면 육아일기를 훔쳐 보는 사람들을 크게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의식이 되면 어떻게 자신의 일기를 전부 공개할 수 있겠는가? 다니엘을 데리고 다니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자유하는 믿음을 많이 배웠다. 그나마 내가 의식이 되는 것은 나는 일기를 가끔 쓰고 싶은데 초기화면의 카운터가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오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들어오셨다가 아무것도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하며 사이트를 닫을 부모님들이 의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반강제로 쓰게 된다. 

그러면 나는 부모님들에게 보여 드리기 위해 일기를 쓰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가 육아일기를 쓰는 이유는 첫째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나는 아이의 교육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아빠인 나의 인생이다. 아빠가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아이도 아빠의 인생을 대신 해 줄 수 없다. 

그만큼 아빠와 아들은 개별의 관계성을 가지면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본다. 

육아일기의 내용을 보면 아빠가 아들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을 살 뿐이다. 나는 한번 뿐인 내 인생이 내 아들로 인해 일그러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들 때문에 내 인생이 비참해 졌다고 하소연하는 한심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 아들로 인해 행복해 질 수는 있어도 아들 때문에 불행해 질 수는 없다. 

불행하게 살기에는 이 한번의 삶은 너무 길지만 행복하게 살기에는 또 이 삶이 너무 짧지 않는가? 나는 사는 날까지 내 삶을 사랑하고 또 내 삶에 손님으로 찾아오는 모든 인간조건이나 환경들을 환영하며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만일 내가 다니엘이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또 그 자식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내가 내 인생을 뒤로 하고 아들을 돕는 삶을 산다면 나는 금새 지쳤을 것이다. 

아무리 피로 맺은 자식이라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그의 인생을 책임져 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바닥을 보일 날이 온다. 또 자식을 아무리 불쌍히 여긴다 하더라도 하는 짓이 항상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어느 시점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소멸하게 된다. 

인간의 착하고 선한 마음은 항상 이렇게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휴머니즘의 딜렘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애주의자는 아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에 지극히 충실하는 이기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면서 까지 아들을 돕게 된 것은 꼭 아들 다니엘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나는 아들을 돕는 과정에서 내 인생을 충실히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내가 육아일기를 쓰는 이유도 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다. 가령, 다니엘이 세월이 흐른 후에 장애의 그늘을 벗고 자기 인생을 치료한다고 애쓴 아빠를 인식한다고 하자. 

그 녀석이 내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빠,고마워요" 이 말밖에 내가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내가 인생의 황금기인 30-40대를 아들의 교육에 매달려 살았는데 지나간 나의 인생은 누가 무엇으로 보상해 줄 것인가? 그러므로 지금 현재 아들 다니엘과 함께 하는 가운데 누리는 희로애락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이것이 인생인 것이다. 나는 이 인생을 즐기고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뒤를 돌아 보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현재 이 순간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되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하며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육아일기를 쓰는 둘째 이유는 아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육아일기를 쓰게 되면서 더욱 아들의 교육에 전념하게 되었다.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사건 속에서도 그 사건에 어찌하든지 의미를 부치는 과정에서 아들을 알아 가게 되었고 아들에게 맞는 교육을 서비스하게 되었음을 확신한다. 셋째는 홍익인간을 위해서다. 세 번째 목적을 위해서 한번 쓴 육아일기를 다시 수정하고 좀 더 좋은 참고재료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