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가지사이로 찬바람이 불어대면 가슴 한구석이 구멍이나 난것처럼 시리다.

어릴적엔 가을이 싫다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예쁜 단풍이 들고 지는 낙엽위로 걷는 내 모습은 낭만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가니 어머니가 이해가 된다.쓸쓸함의 무게와 삶의 무게, 남은 시간에 대한 무게...

우리 멋쟁이 아들이 자폐증에 걸린 것을 안지도 벌서 8년째가 되어간다.

'응애'하며 이세상에 태어난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미국의 한 구석진 병실 밖으로 태극기가 보였었다.커튼사이로 보이는 태극기를 보며 주위의 간호사와 난 아이의 미래를 향한 셀렘에 피곤함도 잊었었다.

너무나도 바쁜 미국생활 속에 아이의 양육을 친정엄마께 맡긴 탓일까,

아이의 성장속의 기억은 쉬는날에나 한번 보는 아이와의 시간에 찍은 비디오의 내용뿐, 친한 친구의 딸이 자폐라는 말을 들으며 그 아이를 걱정하고 또한 그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정작 내 아이의 아픔은 알아차리지 못한 바보같은 엄마였다.

정말 너무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이가 자폐라고 하니 내가 아는 아이의 모습은 내가 보려고만 한 아이의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진정한 모습을 하나 둘 보기 시작하니 막막하고 속상하고 그리고 나에게 벌어진 이 상황을 비관하며 몹쓸 생각도 참 많이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나를 향해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던거 같다.

"엄마 나 할 수 있어. 믿어봐. 하지만 난 아직 세상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엄마가 날 좀 도와 줘"라고...

가끔씩 마주치는 아이의 눈은 너무나 맑았고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은 천사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이 바보같은 엄마는 나를 잠시 잊기로 했다.천사를 나에게 보내신 이유를 알아야 했으니까.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아이를 관찰해서 관찰 일기를 쓰고 육아일기를 쓰고 명탁이의 한달 생활을 돌아보며 명탁이의 0월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죄다 수집했고 전문가만큼은 아니지만 아이의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또 수집했다.

아무리 멀어도 아무리 비싸도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찾아 나섰고 아이가 필요한 교육이라면 하루에 몇시간씩을 달려도 실어 날랐다.그러면서 난 한편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를 위로 했고 아이의 미래를 잣대질했다.

난 신 혜수라는 나를 버리고 이 명탁의 엄마가 된것이 아니라 이명탁의 엄마인 신 헤수가 된것이었다.

분석하고 또 분석하며 아이의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어야 했고 그 이유를 또한 풀려고 다시 전문서적을 뒤졌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계속 자라고 있었다.아이는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고 아직도 자폐성 장애 1급인 아들은 나의 무능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6개월의 초등학교시절을 보내곤 아이의 문제를 생각하려 학교를 그만두고 아이를 데리고 모든 문명의 이기가 없는 시골에서 한달반을 보냈다.아이와 둘만의 시간...

곪았던 고름이 터졌다.난 아이와 둘만 있던 그 시간내내 많이 아팠다.아이를 위한 맞춤식 교육을 하려고 내려간 시골이지만 아이도 나도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돌아오는 결과만 나았다.

분명 최선을 다했는데 아이는 나아지는게 없는것 같았다.아니 어떨 땐 엄마의 노력이 무안해질 정도로 퇴보하는것 같았다.

그리고 작년까지 정말 우린 너무 힘이 들었었다.

저 끝에 빛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빛을 향해 느리지만 가고 있는거 같은데 자꾸 헛탕치는 우리의 모습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를 만났다.아니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나의 신세로 인해 특수아동을 가르치고 있는 그 친구에게 다가가기가 자존심이 상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이 나의 마음 깊은 곳을 후볐다.

" 아이를 200% 믿어야 아이는 올라와. 거짓으로 믿는게 아니라 정말 이 아이는 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지"

그 말을 듣는 그 순간에도 난 아이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난 알고 말았다.실은 아이의 미래를 아이의 능력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의 그늘 속에서 안전하기를 그리고 보호받기를 난 은연중에 바라고 있었던 것을.

친구에게 아이의 교육을 부탁하고 아이를 믿기 시작했다.

아이가 할 수 있다고 믿고 아이에게 자기 나이에 맞는 요구를 했다.

다른 아이가 할 수있다면 너도 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아이가 짜증을 내도 아이에게 이해시키려 많은 설명을 했고 진심으로 아이가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진심이 통했을까. 아이는 2학년이 되자 정말 몰라보게 성장하고 있다.

학교 교내대회이긴 하나 일본어 말하기 대회에서 반대표로 나가 무대위에서 일본어를 말하고 상까지 탔다.

받아쓰기는 물론 학과시험도 보조인원 없이 혼자 하고 있고 점수도 좋게는 나오고 있진 않지만 만족할만하다.

아직도 혼잣말을 심하게 하나 때와 상황에 맞춰 참을 수도 있고 예전에 엄마를 힘들게 했던 폭력적인 성향도 많이 좋아졌다.

2학년이 되면 으례 특수아동은 특수반에 가야한다는 관례를 깨고 보조원을 투입해서라도 일반통합을 하게 도와주신 고마우신 담임선생님인 강 순희선생님의 배려와 사랑 또한 관심 그리고 명탁이를 자기 자식만큼 사랑으로 돌봐준 나의 친구이자 명탁이의 이모이자 선생님인 조은지선생님과 아이에게 놀이의 즐거움과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신 임외국 선생님,비가 와도 아이가 버스를 타고 싶다면 버스를 타고 등교해주는 정말 고마운 유은선 활동도우미 선생님,그외에도 너무 많은 분의 도움으로 우리 아이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200%를 믿는 마음, 그래서 우리 아이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난 오늘도 아이에게 혼자서 목욕을 하라고 한다. 좀 서투르면 어떤가 그러면서 크는거 아닌가.

우리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것이 점점 많아질 것을 확신하니까 난 오늘도 구름위를 걷는다.

가슴으로 난 구멍을 빠져나간 시린 바람이 점점 멀리 사라진다.

앙상한 가지는 봄이 되면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여름이 되면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가을이면 우리에게 수확의 기쁨을 줄 것이다.

난 우리 아들의 미래를 200% 믿는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될까 조심스레 설레이는 밤이다.

오늘 밤에도 찬바람속에서 밝은 달은 청초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