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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은 아흔두 살로 눈은 침침하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한 노신사다. 아내 엘리너가 주님 품으로 가자 존은 더욱더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그러자니 아무래도 혼자 사는 건 무리일 듯했다. 결국 그는 환경이 좋은 복지시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삿날 아침, 존은 여덟 시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말쑥하게 면도한 얼굴은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집 앞에서 존을 태운 택시기사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복지시설에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평소에 하던 습관대로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존은 방으로 안내해줄 직원, 미란다가 나올 때까지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존이 둔탁한 지팡이 소리를 내며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미란다는 그가 앞으로 지낼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모저모 설명했다.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햇볕이 잘 들고 편안한 소파와 멋진 책상도 있다고 했다. 미란다가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자 존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맘에 듭니다. 맘에 들어요. 맘에 든답니다.”
그 말에 미란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선생님, 아직 방을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보여드릴게요.”
존이 말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 방이 맘에 들지 아닐지는 가구의 배치와 상관이 없답니다. 내 마음이 어떤가에 달려 있죠. 행복은 내가 선택하는 겁니다.”
지혜로운 노신사, 존의 말대로 행복은 선택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 우리는 그날을 어떤 날로 만들지 선택할 수 있다. 기분 좋은 날이 될지, 기분 나쁜 날이 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 p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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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판단하는 여러 기준이 있지요.

저는 두 가지를 꼽으라면 아래와 같은 기준을 꼽겠습니다.


1. 책임감이 있는가?

2. 부끄러움을 아는가?


책임감은 사람을 바르게 살게 해주는 커다란 기준입니다. 실수를 한 후에 책임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할 수 있지요.

부끄러움? 그것도 같은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사후 실수를 인정하는 것 뿐 아니라 그로 인한 부끄러움이 작용하여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게 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이에게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살짝 이야기 해봅니다.

물론 부모가 책임의식이 강하다면, 아이를 방치하지도, 과보호 하지도 않게 됩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아이에게 흐름에 따라 솔선수범과 훈육을 통해 아이의 인생에 길잡이로서의 어린 시절을 물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이에게 무책임한 부모가 되는 방법? 

아주 쉽습니다.


갖고파 하는거 웬만하면 다 사주고

하고파 하는거 웬만하면 다 허락(눈감아)해주고

남들 하는거 웬만하면 다 해주는 부모가 되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부모들이 나중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지요.


"뭘 부족하게 해줬니? 부모는 다 해줬다! 니가 잘 못 한거다!"


무책임한 부모의 전형.

오죽 못 났으면, 애 망쳐놓고 그 책임까지 애한테 떠넘길까요~


이런 부모들은 사람으로서, 사회생활에서나 지인들간의 여러 상황에서도 핑계를 만들기 바쁩니다.

책임지지 않을 궁리.

남 탓...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단, 더 큰 일은...자식을 애물단지로 만들어 두고두고 벌받게 된 다는거.

부모야 인과응보라지만, 자식은 또 무슨 죄???

“지각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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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의 독백)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 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득 궁굼했다. 멘토라는거...누군가 나를 멘토로 생각하고 다른 이들에게 그리 말하고 다닌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최근 힐링이니 멘토니 하느님, 예수님, 부처, 알라신 같은 종교적 대상 말고도 많은 현존하는 이들이 말과 글을 통해 "멘토"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보면서 나름 평소 꿰지않고 갖고있던 생각들을 엮어서 글타래를 남겨본다.


먼저 사전적 의미로서의 멘토를 먼저 알아보자.


멘토 [ Mentor ]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로 쓰이는 말.
'멘토'라는 단어는 〈오디세이아 Odyssey〉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의 충실한 조언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에게 맡긴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여년동안 멘토는 왕자의 친구, 선생,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이후로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이다. 멘토의 상대자를 맨티(mantee) 또는 멘토리(mentoree), 프로테제(Protege)라 한다.


멘토로 규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것이 몇 가지.

1. 오랜 시간

 최소한 10년이라고까진 하지 않겠다만. 하지만 오랜 시간 조언자의 자리에서 충실히 그 역할을 충실히 하였을 때 비로소 "멘토"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멘토는 내가 만들거나 지칭하거나 따르는 대상을 지금 정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멘토"라 하기엔 무리가 많다. 물론, 멘토를 재산처럼, 혹은 인맥처럼 늘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그러는데, 심지어 그런 이들에게는 
그 "오랜 시간"이라는 것이 목적이 될까 두렵다.(시험을 위한 공부만 해 온 사람들인지도...)


2. 멘토는 맺어지는 것, 주어지는 것

멘토라는 것을 자기 맘대로 정하고 남들한테 소개하는 이들이 많다. 꼭 상대방의 허락을 득해야 하는 것일까의 여부를 떠나서 멘토라는 역할은 사실 내가 멘토를 선택하고 이성과 의지로 이름지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지 않았더라도 저절로 맺어지고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

위에서와 같이 오디세우스가 멘토에게 맡김으로서 아들 텔레마코스의 스승이 된 것이지, 텔레마코스가 스스로 따랐거나 멘토가 텔레마코스를 가르치겠다고 나서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맺어진다. 멘토와 멘티는...
그래서 가장 멘토를 오해하고 쓰게되면..."이 사람은 내-맘대로-멘토야", 또는 "내 멘토는 누구누구누구누 몇 명이 있지"라고도말하게 된다.

1+2. 이런 의미에서 멘토는 시작하며 쓰는 단어가 아니다. 
(앞의 1, 2에 대한 보충으로) 멘토였음은 지나고 나면 느끼게 되는 자격이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착각으로 툭 내 맘에 잡아 넣어서 되는 자리가 아니다. 오랜 시간 관계가 유지되고 많은 교류와 공감을 통해 결과적으로 "멘토"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의 느낌. 그것이다.

4. 멘토는 역할과 관계의 의미이지, 사람간 상하/고저의 개념이 아님
친구도, 아랫 사람도, 가족도, 종교인도, 범법자도, 심지어 아이조차도 내게 멘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세상엔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전제하에서 세상 누구나 내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내가 갖지 못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내게 내적 성숙과 발전을 이루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오랜 시간 지속해주는 관계는 부분적으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수평적인 개념에서 멘토를 이해해야, "역할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오래오래 충분히 선익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용이하다는 거.

"모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관이다.
올바른 윤리관을 가진 디자이너만이 사회적 책임이 따르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 - 빅터 파파넥


소외된 계층을 위한 , 소수를 위한 디자인을 한 용감한 디자이너 빅터 파파넥 Victor Papan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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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파파넥 Victor Papanek
 
1927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으로, 학창시절 대부분은 영국에서 보내고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건축을 공부하였어요. 1949년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지도를 받았으며, 1950년에 뉴욕의 쿠퍼 유니온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955년에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디자인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는 인류학에서 다루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 7년동안 나바호족, 이누이트, 발리인들과 생활하며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디자인이 단순하게 기술적인 것이나 보이는데 치중하게 되면 진정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놓치게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사회와 환경에 책임을 지는 제품 디자인, 도구 디자인, 사회 기반 시설 디자인을 강력하게 주장한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입니다. 물질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에 디자인의 정신적 가치를 부각시키면서 생태적 균형을 전제로 한 디자인의 실현을 강조하였으며, 그는 안전하지 않고 보기에만 좋은 제품,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제품, 필요없이 생산되는 제품의 생산을 비난했어요. 그가 디자인한 제품, 저술 및 강의들은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고자료 : 위키백과)
 

"디자이너는 사회적, 도덕적 책임감을 의식해야만 한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상품과 환경, 나아가서는 디자이너 자신까지도 형성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빅터 파파넥은 유네스코와 세계 보건 기구를 위한 제품디자인을 하였으며,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택시 디자인, 그의 대표작으로 깡통 라디오등을 만듬으로써 그의 디자인은 인간의 삶을 질을 높이는데서 멈추지 않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빈민계층을 위한 디자인을 하며,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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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라디오
 
1960년대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화산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재난 정보를 들을 라디오가 없는 그들을 위한 단돈 9센트짜리 깡통라디오를 만들어 공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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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트로우 :  단 4,000원인 빨대를 만들어 빈민층을 위한 정수기능을 갖춘 빨대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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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점프 : 아이들이 놀이터에 설치된 플레이 점프에서 신나게 놀면, 그 동력이 지하수의 펌프동력으로 바뀌어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시설물.


"지금까지의 디자인은 상위 10% 사람들만의 위한 것이었다"

 
90%를 위한 디자인. 아름다운 재능을 더 많은 이들을 위한 디자인으로 보여준 빅터 파파넥

빙하시대에 살아남은 자들은

네 번 되풀이된 빙하시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살아난 무리들은
‘달아난 원시인’들이 아니다.
난관을 뚫고,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한 자들은
앉을 나무조차 없어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무리,
나무 열매가 없어지자 짐승을 잡아 고기로 배를 채운 무리,
햇볕을 따라 후퇴하는 대신 옷과 불을 만들어 낸 무리들이다. 
-아놀드 토인비

‘생우우환 사우안락(生于憂患 死于安樂)’이라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사람을 분발하게 하지만
안락한 환경에 처하면 쉽게 죽음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동물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적이 없는 동물은 시간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반면,
천적이 있는 동물은 점점 더 강해지고 
웬만한 공격쯤은 스스로 이겨냅니다.



'생우우환, 사우안락(生于憂患, 死于安樂)'



天將降大任于斯人也 

천강강대임위사인야,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必先勞其心志 

필선노기심지,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지치게 하고


苦其筋骨 

고기근골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餓其体膚 

아기체부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窮乏其身行 

궁핍기선행


그 생활은 빈궁에 빠뜨려


拂亂其所不能 

불난기소불능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是故, 動心忍性 

시고, 동심인성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드겨서 참을성을 길러주며


增益其所不能 

증익기소불능


지금까지 할수 없었던 일도 할구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는 것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쌓는 것이다.

살아온 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잘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잘 해라...모두 하나 버릴 수 없는 시간들이 될 것이니, 그것이 나를 무겁게 할지, 값진 자산이 될 지는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걸...


테무친(징기스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必死卽生 必生卽死



1.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2.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합격했다.


3.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4.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5.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6.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에야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7.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 번 싸워 스물 세 번 이겼다.


8.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9.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 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 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10.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물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11.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으려하면 살것이오 살려하면 죽을 것이다.


 

임금은 살려고 금은보화를 들고 의주로 몽진했다.

그리고 살았다.



나는 죽으려고 칼을 잡고 명량에서 왜놈들과 싸웠다.


그리고 죽었다.



지금 임금을 기억하는 이 없지만

난 임금들이나 들낙거렸을 광화문 한 가운데에 서서 천하를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계속 조선을 지키고 있다.

결론 : 건강 챙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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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지 않고, 맘껏 미치려면...그것도 체력이 관건.

맘 먹는대로 되지 않는다고?


아직 고점을 찍지않은 자라나는 꿈많은 청소년 아닌 이상 몸뚱아리 관리가 기본 바탕이 될 지니...


인생, 후반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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